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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시리즈 VOL5] 시간을 빚고 전통을 품다_대한민국 식품명인을 만나다 : 전통주편
2025.08.12 | 조회 : 60,705 | 댓글 : 0 | 추천 : 0
570 년의 시간을 빚다 — 박준미 명인과 신선주의 이야기
1. 신선주의 뿌리와 정신
금단산 자락의 작은 마을, 함양 박씨 집성촌에서 시작된 신선주는
쌀과 누룩 위에 생지황·숙지황·인삼·당귀 등 10여 가지 약재를 얹어 빚는 ‘보약주’다.
그 자체로 한 가문의 역사이자 지역의 문화유산이며, 마시는 이의 몸과 마음까지 건드리는 술이다.
Q. ‘신선주’를 한마디로 표현하신다면?
박준미 명인 : 신선주는 “시간과 치열함이 응축된 보약주”입니다. 단순한 주류가 아니라 세대를 거쳐 축적된 관찰과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며, 약재와 곡물·누룩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는 복합체입니다. 첫맛에는 곡물의 은은한 단맛이 스치고, 중간에는 약재의 향이 층을 이루며, 마무리에는 약간의 쌉싸래함과 긴 여운이 남습니다. 이 맛과 향의 조화는 단기간의 기술로는 만들 수 없고, 오랜 시간 재료와 발효를 관찰해 얻은 감각이 있어야만 구현됩니다.
Q. 이름 ‘신선주’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박준미 명인 : 전승으로 전해진 이야기에는 이 술을 마신 어르신들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샘솟는다,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라고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고 전합니다. 저는 이 이름이 술의 효능을 과장하는 표어가 아니라, 술이 가진 ‘회복과 활력’이라는 본질을 정확히 짚어낸 상징이라고 봅니다. 술에는 단지 도수와 향뿐 아니라 사람과 계절, 손맛과 기억이 들어 있으므로, 이름 자체가 그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Q. 신선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인가요?
박준미 명인 : 신선주의 핵심은 ‘유연한 약재 배합과 삼양(三釀)의 단계’입니다. 해마다 약재 수급과 기후가 달라지므로 약재 비율을 그대로 고정하지 않고, 재료의 상태에 맞춰 조절합니다. 또한 단양→이양→삼양으로 세 번 빚어 깊은 풍미를 얻는 전통 방식이 유지되어, 각 단계마다 온도·시간·누룩 배합을 달리해 층을 쌓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로 인해 같은 이름의 술이라도 매해 다른 캐릭터를 띠는 ‘살아있는 전통주’가 됩니다.
2. 가문의 역사와 어린 시절
신선주는 집안의 제례와 잔치에서 빠지지 않았고, 그 풍경은 박준미 명인의 기억 속에 계절처럼 새겨져 있다.
대가족의 삶과 술빛이 맞닿는 순간들이 명인의 손끝에 전해졌다.
Q. 어린 시절, 술 빚는 풍경이 어떻게 기억되나요?
박준미 명인 : 겨울 아침이면 마당에 항아리가 줄지어 서 있고 볏짚 냄새와 찐 곡물 향이 어우러졌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누룩을 반죽하고 약재를 손질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저는 쌀을 씻거나 약재를 씻는 단순한 일로 참여했습니다. 그런 일상이 반복되며 저는 발효의 미세한 변화 김이 오르는 시간, 항아리의 따뜻함, 누룩 냄새의 차이를 몸으로 배웠습니다. 그 기억은 기술 그 자체보다 정성과 시간의 가치를 먼저 가르쳤습니다.
Q. 아버지의 영향은 어떠했나요?
박준미 명인 : 아버지는 전통주 기능보유자였고, 전국 각지에서 신선주를 알리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집안에서는 엄격했지만 양조에 대해서는 원칙을 고수하셨죠. “재료에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시연을 따라다니며 사람들의 반응을 보았던 경험이 저에게는 ‘전통을 외부에 설명하고 설득하는 법’과 ‘명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몸으로 익히는 교육이었습니다.
Q. 어머니와 여성 가족 구성원의 역할은 어땠나요?
박준미 명인 : 어머니는 손끝의 섬세함으로 술의 품질을 좌우하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약재 손질, 쌀의 세척과 침지, 누룩의 감별 등 많은 세밀한 단계는 주로 여성의 일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길은 ‘정직한 재료와 정성’이란 가훈을 일상으로 실천하는 방식이었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며 ‘노력의 투명성’이 술맛으로 직결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전통적 분업은 지금도 저의 양조 철학에 깊게 남아 있습니다.
3. 시련과 결심
전통은 때때로 경제적 현실과 충돌한다. 1990년대의 큰 실패는 신선주의 존재 자체를 위협했지만,
그 위기를 통해 전수와 복원의 결심도 깊어졌다.
Q. 1990년대의 경제적 위기는 어떤 상처를 남겼나요?
박준미 명인 : 아버지의 결단으로 양조장을 설립했지만, 유통망 부재와 과도한 초기투자로 인해 부도가 났습니다. 이로 인해 고택과 양조장이 경매로 넘어가고, 집안의 물건들이 흩어지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물리적 손실 외에도 ‘가문의 자부심’이 흔들렸고, 전통이 한순간에 사적 부채와 연결되는 씁쓸한 현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기술적 손실만이 아닌, 문화적 정체성의 위기였습니다.
Q. 포기와 결단 사이에서 어떤 심정이었나요?
박준미 명인 : 현실적 어려움 앞에서 수차례 포기의 유혹이 왔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고민하며 ‘왜 이 일을 고집하나’라는 질문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상의 손때와 항아리에서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가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내가 끝내지 않으면 역사가 끊어진다’는 자책과 책임감이 결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저는 개인적 안정보다 전통을 잇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Q. 복원을 위해 처음으로 무엇을 하셨나요?
박준미 명인 : 1999년, 병중이던 아버지로부터 체계적으로 전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 몇 개로 소규모 실험을 반복했고, 누룩 배합과 발효 조건을 세밀히 기록했습니다. 초기에는 실패와 버림이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재료의 품질·누룩의 성격·발효 온도’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점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행정적·위생적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준비도 병행했습니다.
4. 술 빚는 철학과 비법
신선주는 재료 선택과 발효 관리, 그리고 숙성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정직’과 ‘인내’를 중시한다.
명인은 이 철학을 지키기 위해 세심한 기준을 세웠다.
Q. 신선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빚나요? 과정과 순서를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박준미 명인 : 신선주는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뉩니다. 먼저 첫째, 원재료 준비입니다. 좋은 햅쌀을 깨끗이 세척해 불린 후, 찰지고 윤기 나는 고두밥으로 찌는 것이 시작입니다. 동시에 약재는 신선도를 유지하며 깨끗이 세척·건조하여 준비합니다. 둘째, 누룩 띄우기입니다. 집안 전통 누룩을 적정 온·습도에서 띄워 누룩 고유의 효모와 유산균을 활성화합니다. 셋째, 단양주(첫 술) 빚기입니다. 고두밥과 누룩, 물을 일정 비율로 섞어 항아리에 넣고 발효를 시작합니다. 이때 약재 일부를 넣어 약효와 향미를 더합니다. 넷째, 이양주와 삼양주 단계입니다. 단양주가 발효된 후, 추가 고두밥과 누룩, 약재를 더해 두 번 더 발효시킵니다. 이 과정은 술의 깊이와 향을 다층적으로 쌓는 핵심 단계입니다. 다섯째, 증류와 숙성입니다. 완성된 술을 전통 증류기로 증류해 불순물을 걸러내고, 항아리나 도자기 숙성실에서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며 수개월간 숙성합니다. 전체 과정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 계절과 온도에 따라 세밀한 조정과 관찰이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 ‘손맛’과 ‘시간’이라는 두 축이 신선주의 완성도를 결정짓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Q. 신선주의 주요 재료와 재료 선택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원칙은 무엇인가요?
박준미 명인 : 신선주에는 12가지의 주요 재료가 들어갑니다. 생지황, 숙지황, 인삼, 당귀, 감국, 구기자, 육계, 맥문동, 하수오, 우슬 등 10가지 약재에 쌀과 밀 등이죠.
절대 양보하지 않는 원칙, 첫째는 ‘원재료의 정직성’입니다. 햅쌀 중에서도 윤기와 단맛이 좋은 쌀만을 고르며, 한약재는 산지와 건조 상태, 저장 기간까지 확인합니다. 판매처는 신뢰할 수 있는 약재상과 직거래를 원칙으로 합니다. 둘째는 ‘적절한 시기성’입니다. 같은 약재라도 채취 시기와 건조법에 따라 향과 약성이 달라지므로, 최적의 상태인 재료만을 사용합니다. 품질이 떨어지는 재료는 과감히 배제하는 것이 제 원칙입니다.
Q. 발효(누룩·밑술·본발효) 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박준미 명인 : 누룩 띄우기부터 삼양의 각 단계는 온도·습도·시간의 미세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초복과 중복 사이의 기온을 이용해 누룩을 띄우고, 고두밥과 누룩의 결합 비율을 조절해 단양주를 만듭니다. 이양주와 삼양주 단계에서는 효모 활동을 관찰하며 발효 속도를 관리합니다. 발효 중에는 낮과 밤의 온도 차, 환기, 항아리 위치를 바꿔 미세한 조건을 통제합니다. 이 모든 절차가 술의 부드러움과 향의 균형을 결정합니다.
Q. 숙성 과정에서 특별히 지키는 관행은 무엇인가요?
박준미 명인 : 발효가 끝난 후 숙성은 최소 수개월에서 보통 100일 이상 시행합니다. 숙성실의 온·습도 관리는 미세하게 조정하며, 숙성 중에는 주기적으로 향과 맛을 확인해 불량 징후를 제거합니다. 약주를 증류해 만드는 증류주(신선주)의 경우 초기 증류에서 나오는 10%는 버려 메탄올 같은 유해 성분을 제거합니다. 숙성은 ‘시간이 주는 완성도’를 믿는 과정이기에 인내와 엄격한 품질관리가 필수입니다.
Q. 전통과 현대 기술을 접목한 부분이 있다면요?
박준미 명인 : 전통 방식의 본질은 유지하되, 위생·안전·효율을 위해 일부 현대적 장비와 분석을 활용합니다. 예를 들어 발효 온도를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온도계와 환기 시스템을 도입했고, 재료의 수분 함량과 알코올 분석은 실험실 검사를 통해 보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은 전통적 감각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조하는 수단으로만 사용합니다. 결국 ‘감각으로 확인하고, 수치로 보완한다’는 원칙입니다.
5. 신선주의 미래, 전수자 이경민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수자 선택과 후계 양성은 그 전통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박준미 명인은 아들 이경민 씨를 전수자로 정하고 함께 길을 닦고 있다.
Q. 전수자는 어떻게 결정했나요? 가족 내 논의는 어땠나요?
박준미 명인 : 대한민국 식품명인은 1년이 지나면 전수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전수자인 아들도 신선주 기능 보유자인 할아버지에게 어린 시절부터 신선주를 배웠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 처럼 아들이 저를 도와 항아리를 옮기고, 무거운 쌀을 나르는 것이 전수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Q. 이경민 전수자의 배경과 준비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박준미 명인 : 이경민 전수자는 건축을 전공하고 서울에서 인턴 생활을 경험한 뒤 청주로 돌아와 양조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술과 발효에 관한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관련 대학원 과정까지 진학해 발효과학과 디자인을 접목하는 공부를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어머니와 함께 누룩·발효·증류 과정을 반복 학습했고, 전통의 손맛을 보존하면서도 디자인과 브랜딩 등 현대 기술을 실험하는 방식으로 준비했습니다. 학문과 현장의 결합이 그의 강점입니다.
Q. 어머니(명인)와 전수자(아들)의 협업 방식은 어떠한가요?
박준미 명인 : 협업은 상호 존중과 분업의 형태로 이뤄집니다. 어머니는 전통기술과 미세한 손맛 관리를 책임지고, 아들은 연구적 접근과 디자인·마케팅을 담당합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결정적인 맛 조정이나 새로운 시도는 함께 시음하고 토의해 결론을 냅니다. 이렇게 세대가 다른 관점이 충돌하면서도 보완될 때 신선주는 전통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에 맞게 진화합니다.
Q. 이경민 전수자가 도입한 변화나 실험은 어떤 게 있나요?
박준미 명인 : 이경민 전수자는 디자인과 소비자 경험에 민감해 병 디자인 개선과 같은 트렌디한 접근을 통해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물론 ‘인공 첨가물 금지’ 원칙을 철저히 지키며, 실험은 전통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최근 전통주의 대중화를 위해 선보인 대중 막걸리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죠.
6. 현재의 자리와 미래의 약속
명인의 손에서 빚어지는 술은 현재의 삶과 미래 세대에게 전할 유산이다.
박준미 명인은 전통을 지키되 더 많은 이들이 신선주를 만나도록 길을 열고자 한다.
Q. 전승교육사로서 젊은 양조인 교육은 어떻게 진행하나요?
박준미 명인 : 전승교육은 실습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기초 누룩 띄우기부터 발효 관찰, 약재 선별, 숙성 관리까지 단계별로 교육생이 직접 손으로 경험하도록 합니다. 또한 기록화 작업을 병행해 감각에 의존한 기술을 문서화하려는 노력도 합니다. 실습 후에는 소규모 생산을 통해 책임감을 키우고 전통과 공동체적 가치를 체감하게 합니다.
Q. 대중과의 접점—체험·교육·홍보는 어떻게 전개하고 있나요?
박준미 명인 : 체험 프로그램은 단양주 방식의 약식 체험부터 계절별 계절주 만들기까지 다양합니다. 팝업 스토어와 페어링 클래스, 지역 축제 참가를 통해 젊은층과 외국인에게 신선주를 소개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양조 과정과 이야기(스토리텔링)를 영상으로 공유해 접근성을 높였습니다. 이런 노력은 ‘마시는 경험’ 자체를 교육의 일부로 보려는 전략입니다.
Q. 마지막으로 10년 뒤, 100년 뒤 신선주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시나요?
박준미 명인 : 10년 뒤에는 신선주가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으로 자리 잡아, 관광·교육·한식 페어링 분야에서 자리를 잡았으면 합니다. 100년 뒤에는 손으로 빚는 ‘본질’은 유지되되, 기록과 교육을 통해 누구든 전통을 이어갈 수 있는 체계가 확립되어 있길 바랍니다. 제 바람은 단 하나입니다. ‘신선주’라는 이름의 술이 시대를 건너며 꾸준히 사람들의 식탁과 기억 속에 남는 것, 그것이 제가 남기고자 하는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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