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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식품명인 제90호 고화순

[기획시리즈 VOL7] 시간을 빚고 전통을 품다_대한민국식품명인을 만나다 : 고사리나물편

2025.10.13 | 조회 : 1,112 | 댓글 : 0 | 추천 : 0

 

 

나물 DNA, 미래를 열다 

대한민국식품명인 제 90호 고화순 명인 

 

 

봄마다 들과 산에서 다시 살아나는 새순처럼, 우리의 밥상도 세대를 건너며 나물의 기억을 되살린다. “우리는 나물의 민족”이라는 말처럼, 비빔밥과 육개장은 여전히 식탁의 중심에 있고, 묵나물은 겨울을 견디는 지혜로 남아 있다. 2021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나물류 제조’ 대한민국식품명인(제90호)으로 지정된 고화순은 이 오래된 문화를 오늘의 산업과 세계의 언어로 번역해 온 사람이다. 울진 금강송면 왕피리에서 시작된 4대(100년)의 손맛, 문헌고증으로 복원한 전통 제조 비법, 학교급식·HMR·수출로 확장한 비즈니스, 그리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를 향한 꿈까지—‘고사리나물 제조 명인’ 고화순을 만났다.

 

고사리에서 읽는 한국의 음식 DNA

 

Q. ‘나물 DNA’라는 표현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명인님에게 나물이란 무엇인가요?

고화순명인: 나물은 제 생애 그 자체예요. 외할머니—어머니—저—딸로 이어진 4대의 손길, 그 사이를 흐르는 시간의 맛이죠. 밭작물처럼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계절과 함께 채취하고, 데치고, 말리고, 다시 불려서 삶에 맞추는 과정이 모두 문화입니다. 그러니 ‘DNA’라는 말이 딱 맞아요. 몸에 스며들어 일상과 의례, 산업까지 이어지니까요.

 

Q. 대한민국식품명인(제90호, 고사리나물 제조) 지정을 받았을 때의 의미와 소감은?

고화순명인: ‘처음’이라는 단어의 책임을 깊게 느꼈습니다. 고사리나물 제조가 전통 식문화의 한 항목으로 공식화됐다는 사실이 기뻤고, 동시에 표준과 전승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마음도 들었죠. 제게는 4대의 시간과 농가·학교·소비자와의 약속이 함께 담긴 훈장입니다.

 

 

 

Q. 고사리는 얼마나 오래된 식물인가요? 그 기원과 진화가 궁금합니다.

고화순명인: 고사리의 조상은 고생대부터 포자를 날리며 번식하던 양치식물이에요. 공룡이 사라지고 속씨식물의 시대가 열린 뒤에도 6,500만 년을 경쟁하며 살아남았죠. 오늘 우리가 먹는 식용 고사리 속 양치류는 신생대 무렵에 자리 잡았고, 지금도 북극·남극을 제외한 전 지구에 분포합니다.

 

Q. 한국의 고사리, 어느 정도나 자라고 생산되나요?

고화순명인: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고사리는 약 360여 종으로 알려져 있고, 양지바른 야산이면 군락을 이룹니다. 주산지는 경남 남해·함안, 전남 순천·구례, 제주 등이고요. 2021년 산림청 통계로 생산량 8,403톤, 생산액 538억 원 수준이었습니다. 남해군은 단일품목으로 전국 생산의 약 12%(1,040톤)를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예요.

 

 

 

Q. ‘고사리’라는 말의 어원도 흥미롭습니다. 어떤 설이 있나요?

고화순명인: ‘구살이(아홉 번 산다)’에서 왔다는 설이 유명합니다. 줄기를 잘라내도 며칠 뒤 다시 올라오는 생명력을 빗댄 말이죠. ‘굽사리/곡사리’에서 파생됐다는 설도 있어요. 새순이 동글게 말린 모양, 하얀 솜털(絲) 이미지가 언어에 스며든 것이죠.

 

Q. 우리 조상들과 고사리의 관계, 고대 유물과 기록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나요?

고화순명인: 간두령·팔두령 같은 무구에서 고사리 문양을 볼 수 있어 신성시됐음을 짐작합니다. 삼국시대 수막새·토기 문양으로,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에 종묘에 올리는 시물(3월 고사리)로 기록돼요.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 곧 계절·의례의 상징이었습니다.

 

 

Q. 차례상의 ‘삼색나물’에서 고사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고화순명인: 도라지는 뿌리로 조상, 고사리는 줄기로 부모, 시금치는 잎으로 자손을 상징합니다. 정월대보름 ‘아홉 묵나물’ 풍습도 이어지고요. 나물은 단순 반찬이 아니라 관계를 잇는 상징 언어예요.

 

Q. 전통놀이 ‘고사리꺾기놀이’와 ‘괴비고사리놀이’는 어떤 문화인가요?

고화순명인: 강강술래처럼 손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동작을 이어가는 집단놀이예요. 지역마다 사설이 다른데, 고사리를 꺾어 부모님께 드리고 제례에 올린다는 내용이 반복됩니다. 삶과 놀이, 효와 의례가 한데 묶인 민속문화죠.

 

Q. 서양의 ‘고사리 열풍(fern craze)’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고화순명인: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워드가 고안한 워디안 케이스(휴대용 테라리엄) 덕에 희귀 고사리를 ‘살아 있는 채’ 유럽으로 들여오며 수집·관상이 폭발했죠. 직물·도자기·가구·서적까지 고사리 문양이 대유행했습니다. 과도한 채집이 식생을 해치며 열풍은 사그라들었지만, 고사리가 얼마나 매혹적인 식물인지 보여주는 사례예요.

 

 

울진에서 남양주까지, 나물로 세운 한길

 

Q. 명인님의 ‘고사리 인생’은 어디서 시작되었나요?

고화순명인: 경북 울진 금강송면 왕피리입니다. 왕피천, 금강송, 은어가 어우러진 산촌에서 봄이면 고사리·두릅, 여름엔 취·곤드레, 가을엔 토란대·시래기… 사계절이 나물이었죠. 외할머니·어머니와 5일장에 내다 팔며 손끝으로 배웠습니다.

 

Q. 묵나물은 왜 지혜였는지, 영양학적 장점도 설명해 주세요.

고화순명인: 말리면 효소와 미생물 활동이 억제돼 저장성이 생기고, 햇볕 건조 과정에서 비타민D와 엽산이 늘어납니다. 수분은 줄어도 단맛과 무기질·식이섬유는 농축돼요. 겨울철 부족한 영양을 채우는 ‘저장 기술’이자 건강식이었죠.

 

Q.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도 나물과의 인연이 이어졌다고요.

고화순명인: 제약회사에 다니다가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졌고, 학교급식 식재료 납품을 맡으면서 다시 ‘나물’이 제 일로 돌아왔습니다. WTO 이후 중국산 나물이 쏟아지며 친정이 큰 타격을 받았고, 저는 학교 현장을 뛰며 국산 나물의 품질·전처리·맞춤 납품으로 설득했어요.

 

 

Q. ‘미소식품’에서 ‘하늘농가㈜’까지—창업과 전환의 결정적 순간은?

고화순명인: OEM 파기로 큰 위기를 맞으며 ‘자체 브랜드’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사재를 털어 하늘농가를 만들었죠. 구의동 작은 작업실에서 시작해 남양주로 이전, 법인화하며 설비·품질·유통 시스템을 갖췄습니다.

 

Q. 하늘농가의 경영철학은 무엇입니까?

고화순명인: “깨끗하고 안전한 식품, 고객 맞춤형 생산.” 학교가 바로 조리할 수 있도록 씻고 손질해 절단까지 한 ‘전처리 나물’을 전국 최초로 제공했습니다. 갑작스런 메뉴 변경에도 즉응하는 민첩함으로 대기업이 못하는 것을 했죠.

 

Q. 숫자로 보는 현재의 하늘농가—규모와 포트폴리오를 들려주세요.

고화순명인: 전국 800여 농가와 계약재배, 수도권 5,000여 초·중·고 급식과 기업 구내식당, 온·오프라인 채널에 32종 182개 품목을 공급합니다. 2013년 매출 100억 원을 돌파했고, 2017년부터 미국·영국·캐나다·호주·홍콩 등으로 수출을 시작했죠.

 

 

Q. 식품안전·품질관리는 어떻게 담보하나요?

고화순명인: HACCP·GAP·G마크 등 인증 체계를 갖추고 선주문-후생산으로 신선도를 끌어올리며, 합성첨가물·보존료 없이도 맛과 안전을 지킵니다. 창업 이후 ‘위생 안전사고 제로’ 기록은 가장 자랑스러운 성과예요.

 

Q. 사회공헌과 일자리—특히 어르신 고용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고화순명인: 대한노인회와 협력해 어르신 일자리를 꾸준히 만들어 왔어요. “손주 용돈을 내 돈으로 줄 수 있어 행복하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만드는 것은 반찬만이 아니라 ‘존엄’과 ‘기쁨’이라는 걸 실감합니다.

 

전통의 기술에서 세계의 식탁으로

 

Q. 고사리는 왜 ‘산에서 나는 소고기’인가요? 채취의 요령도 알려주세요.

고화순명인: 식물성 단백질과 칼슘·비타민A·B, 철분, 사포닌·플라보노이드 등 영양이 풍부하거든요. 3월 하순~6월 말, 10~15cm 자란 통통한 어린순을 줄기 아랫부분에서 ‘딱’ 끊어야 부드럽습니다.

 

Q. 일상에서 쉽게 따라 할 ‘볶음’ 팁을 소개해 주세요.

고화순명인: 말린 고사리는 40℃ 온수에 약 3시간 불리고, 끓으면 찬물을 ‘한 바가지’ 부어 온도를 낮춘 뒤 12시간 이상 담가요. 씻어 5cm로 썰고 간장·마늘·파·참기름으로 밑간, 들기름에 볶다가 다시마육수로 뜸 들이면 결이 살아납니다. 마지막 통깨 한 꼬집. 간단하죠?

 

 

Q. ‘고사리 독성’ 우려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고화순명인: 타킬로사이드는 수용성이라 데치기·불림·우려내기를 거치면 유의미하게 감소합니다. 물 갈기를 3~4회, 12시간 이상 담가내면 안전합니다. 몇 달 내내 고사리만 집중 섭취하는 비현실적 상황이 아니라면, 조리법을 지킨 나물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Q. 전통 제조 비법—문헌고증은 어떻게 진행하셨나요?

고화순명인: 『해동농서』, 『규합총서』, 『임원십육지』, 『산가요록』 등 23개 고문헌을 대조해 삶기·재(灰) 처리·건조·불림·볶음의 체계를 복원했습니다. 외할머니의 손기술이 기억의 실마리가 되어 문헌을 ‘살아 있는 조리법’으로 되살릴 수 있었죠.

 

Q. ‘건조 비법’의 핵심 6단계를 간단히 정리해 주신다면요?

고화순명인: (1) 수확: 초물·중물의 동글게 말린 어린순 (2) 데치기: 절반만 익혀 결 보존 (3) 식히기: 흐르는 물로 열 제거 (4) 털어주기: 살살 물기만, 코팅·손상 방지 (5) 건조: 태양건조, 뭉침 금지, 완전 건조로 위생·보관성 확보(중량 약 1/12) (6) 비벼주기: 2시간 간격 뒤집고 비벼 자외선 코팅막을 벗겨 식감 개선 -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Q. ‘불림 비법’에서 쌀뜨물과 ‘찬물 한 바가지’의 의미는?

고화순명인: 쌀뜨물은 묵은내 제거와 향미 복원에 좋아요. 끓는 지점에서 찬물을 부어 온도를 약 70℃로 낮추면 조직이 무르지 않고 ‘통통한 결’이 살아납니다. 이후 3시간 간격으로 물을 갈아 우려내면 쓴맛·아린맛·잔여 독성이 사라집니다.

 

 

Q. ‘볶는 비법’—전통 레시피와 오늘의 응용은 어떻게 만나나요?

고화순명인: 『시의전서』·『조선요리(조선료리)』의 방식은 간결합니다. 길이 썰어 간장·마늘·파·기름으로 볶고 깨로 마감하죠. 오늘은 여기에 다시마육수로 짧게 뜸을 들여 감칠맛을 올리거나, 고사리전을 부쳐 술안주·브런치로 제안합니다.

 

Q. HMR 연구소 설립과 코로나 시기 돌파 전략이 궁금합니다.

고화순명인: 2016년 HMR 연구실을 만들고, ‘전처리+양념’에서 더 나아가 전자레인지 2분 조리 가능한 냉동나물·밀키트를 개발했습니다. 학교급식이 멈춘 팬데믹 때 홈쇼핑·온라인으로 판로를 전환했고, 그때 축적한 포장·레시피 기술이 지금의 카테고리 확장으로 이어졌죠.

 

Q. ‘나물문화연구소’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등재 구상은 어디까지 왔나요?

고화순명인: 2022년 나물문화연구소를 세워 조사·기록·교육을 체계화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의 핵심은 전승성과 공동체성, 현대적 실천과 지속가능한 가치예요. 김장, 장 담그기처럼 ‘나물 문화’도 계절·의례·건강·비건 식생활을 잇는 살아 있는 유산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Q. 고사리와 환경—기후위기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고화순명인: 양치식물로서 이산화탄소 흡수·저장 능력이 뛰어나고, 토양에 뿌리를 촘촘히 내리며 산불·산사태 훼손지 복구에도 유익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모든 위기를 해결할 수 없지만, 식생 회복과 생태 감수성을 높이는 상징이자 실천의 시작점이죠.

 

Q. 세계화 전략—K-푸드 속 ‘나물’은 어디로 가고 있나요?

고화순명인: 비빔밥·김밥·사찰음식·비건 식문화의 세계적 확산과 맞물려 나물은 ‘가벼운 채식의 감각’과 ‘스토리가 있는 저장 기술’을 함께 전합니다. 우리는 미국·영국·캐나다·호주·홍콩 등으로 수출하며 레인지쿡·밀키트로 현지 조리 장벽을 낮췄고, 셰프·리테일과의 컬래버로 식탁의 맥락을 만들고 있어요.

 

Q. 전승의 다음 주자는 누구인가요?

고화순명인: 차녀 박미소가 4대 계승자로 비법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손의 기억’을 기술과 데이터로 남겨 표준화하고, 동시에 지역 농가·어르신 일자리·교육 프로그램으로 전승의 생태계를 확장하려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목표와 다짐을 들려주세요.

고화순명인: 처음 명인의 꿈은 ‘너무 높은 산’ 같았지만, 한 발씩 오르니 길이 보였습니다. 유네스코 등재도 그러리라 믿어요. 더 넓은 수출 시장, 더 정교한 HMR, 더 탄탄한 전승 체계로 ‘대한민국의 나물 문화’를 세계의 보편 가치로 자리매김시키겠습니다. 언젠가 세계인이 나물 한 접시를 통해 한국의 계절·의례·삶의 지혜를 맛보게 되는 날, 그때가 제가 꿈꾸는 정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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